우리 회사는 노숙인 급식, 판자촌 연탄배달, 고아원 봉사활동을 한다.
굳이 주말에, 아무런 보상도 없는데 자발적으로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회사 직원들은 분명 “착한” 사람들 일 것이다. 노숙인에게 웃음으로 대하고, 팔이 부러져라 연탄을 나르고...
그러나, 이 단순하기 짝이 없는 '봉사활동'이 나에겐 너무 복잡하게 느껴진다.
이 판자촌 사람들이, 우리 회사 사람들의 뉴타운 입주로 인해 집을 잃은 원주민이라면? 우리네 회사원과의 경쟁에서 밀려, 해고당한 사람이라면? 그들이 그토록 시끄럽다고 눈쌀 찌뿌리는, 빨간 띠 두른 시위대들의 구호가 실은 이거라면?
그래서 나는, 봉사활동 참가하는 직원들을 보며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저 명품가방, 명품자가용, 큰 집을 소유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위안을 위하여 “봉사활동”이라는 아주 훌륭한 아이템을 또한 소비하고 있다' 라고 말이다. 물론 본인들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겠지만, 몰랐다고 해서 죄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이 사회에 정확히 한표의 책임이 있는 유권자인 성인들인데, 무지해도 괜찮다는 말, 정치는 잘 몰라~ 라는 말은 졸업해야 할 때가 지나도 벌써 지났어야 한다.
가톨릭학생회에서는 ‘농활’을 ‘농촌공소활동’의 약자라고 한다. 잘 모르는 후배들이 행여나 '농촌봉사활동'이라고 할 때에는 반드시 수정해주어야 한다. 공소활동이란, 농촌에서 신앙공동체 생활을 하며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 동아리 회원들은 가기 전에 사전 교육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느껴야 하는지 고민한다.
회사 봉사활동이 문제인 가장 큰 이유는 봉사활동의 의미 혹은 그들에 대한 이해의 부재이다. 회사사람들을 대상으로 판자촌 사람들이 왜 여기 모였는지, 지금 또 쫓겨날 위기에 있는지, 어떤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설지, 재개발이 만드는 양극화. 이런 얘기를 할 수는 없다. 차선이지만, 그나마 "착한" 이들에게 감정으로 호소하여 '돈'을 많이 기부하는 것 뿐.
다음 봉사활동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다시금 여러 고민이 시작된다. 늘 돌고 도는 고민이다, 자칫하면 이 봉사활동이, "가난한 이들의 존재"를 '봉사활동'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못박게 되진 않을까, 그들(봉사활동 받는이들)과 우리들(봉사활동 해주는 이들)을 가르게 되진 않을까, 그러면서 시선을 아래로 내려다보진 않을까, 봉사활동 참가자들의 "착한 행동"과 대치되는 일상은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여러 고민을 하다보면, 결론은 회사 내부에서는 불가능 하고, 대신 좀 더 유연한 사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독서모임, 영화모임, 종교단체 모임, 기타 등등...
더 나아가, 봉사활동이 필요 없는 사회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어렵다, 아 어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