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번 더 불러보고 좀 더 고치고 하려다가.. 이건 어디까지나 습작이니까. 으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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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 더 불러보고 좀 더 고치고 하려다가.. 이건 어디까지나 습작이니까. 으흣;
~ 아주 짤막한 평 ~
1. 과장되었다. 혹은? 억지스럽다.
2. 사실은 억지스럽지 않다. 억지스럽다고 믿고 싶을 뿐이었다.
3. 사실은 과장되지도 않았다. 우리네가 사는 집, 우리네 옆집의 흔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4. 너무 익숙해서, “내” 얘기 같아서 조금 고통스러웠다.
여러 고민을 던져주는 연극. 의미있는 연극이다. 배우들의 열연도 훌륭하다.
5. 기타 이것저것은 어제 수다로 풀었으니 패쑤~
궁금하신 분들은 가서 직접 보시길 바래요.
김갑수 감독 및 여러 배우들이 힘 받을 수 있게 >.<
자세한 공연정보는:: http://club.cyworld.com/kimkapsoo
(나는 어제 보았는데, 수요일은 일명 ::후불제 공연:: 이다. ^__^ 모험은 따르겠으나, 재미난 시도라 여겨짐! )
전국노래자랑 특집방송을 보다가, 할머니가 "죽으란 법은 없어, 다 적어도 한가지 재능은 타고 나니까."라고 하셨다. 그 예로, 할머니 어렸을 적 최대 우상인 동네 "구두 딲~!" 소년도 언급하셨다. 그 수완과 붙임성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면서.
얼마 전 미사에서 들었던 강론 내용이 생각났다. 각자 가진 달란트가 있고, 그 달란트를 잘 활용해야 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각자의 달란트에 따라 직업을 갖고, 집 설계도 그리는 사람, 집 만드는 사람, 그 안을 인테리어 하는 사람, 가구 만드는 사람부터 해서 그 안에서 공부하는 사람, 요리하는 사람, 아이를 돌보는 사람, 생필품을 제작하는 사람 등 수억만개의 다양한 직업들이 상호 연결된다. 또한 누구는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고, 누구는 드라마. 개그를 보여주고, 누구는 멋진 쇼를 보여준다.
한편으로 자신의 달란트를 살리기보다는 '안정적인 직업', '돈 많이 버는 직업', '권력 있는 직업' 에 연연하는 사람들은, 직업에 대한 사명감보다는 뒷돈받기, 아부해서 승진하기 식으로 자신의 꿈 뿐만 아니라 다른이의 삶까지 파괴하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은 이런 사람들이 거의 모든 직업군의 윗자리를 다 움켜쥔 터라, 더 이상 직업=달란트 살리기 라는 개념이 무의미해진 것 같다.
일 자체가 재미없으면 자꾸 잿밥에 눈을 돌리게 된다. "내가 이 고생하는데 뭐라도 더 뜯어내야지, 몇푼이라도 더 받아챙겨야지" 라며, 사실 회사도 나에게 1의 월급을 주면서 늘 1.2 이상의 노동력을 요구하지 않는가. 서로 뜯고 뜯기는 관계이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나는 여기에서 꾸준히 내 부와 지위를 축적할 생각도 없는데.
빨리 내 달란트에 꼭 맞는 자리를 찾고 싶다. 그동안은 내 업이 내 달란트가 아녀도 재미있게 잘 해온 편이었다, 여기서 사회다각적인 문제를 직면하는 것이 신기했고, 그걸 분석하는 것도 이 업의 부가적인 즐거움이었다.
아직 삶이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독보적인 달란트는 딱히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종종 글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나의 글쓰기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며 생활적인 이야기이고, 단체 활동에 열심회원으로서 기웃기웃하는 걸 좋아하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노래와 음악을 하루 종일 하면서 살 수 있을까? 이 부분도 자신이 없다.
하지만 아직 앞길, 발전할 길이 창창히 보인다는 것도(!) 한편의 달란트가 아닐까 싶다.
한번뿐인 인생, 할일도 많고 놀일도 많다.
인생 길게,!
간지러운 노래도 만들어봄! 푸풉
그냥 평소의 일요일과 다를 바 없는 크리스마스였지만,
하루종일 우쿨이랑 뒹굴다보니,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악상이 떠올랐.(으나 별로 음악성은 없음)
그냥 창작곡.이라는 것에 의의를................. -////-
미안해 하는 사이
~__~
올 여름에 끄적인 노래.
내 마음을 그대로 담아내어 참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본인 노래를 본인 입으로;;;)
여름에는 우쿨렐레로 뚜둥기면서 작곡했던 곡인데, 오늘 건반으로 반주해보았다.
1. 우쿨 반주 ver.
2. 건반 반주 ver.
검 은 별
별은 빛나는 별만 별인가요, 아름답게 비춰야만 별인가요,
저 어딘가 조용히 빛을 머금고 있는 검은 별도 있어요
남들처럼 빛은 없지만
남들처럼 빛나지 않지만
뭐가 중요해, 나는 검은 별, 나는 검은 별
남들처럼 빛은 없지만
나는 나만의 매력이 있다고
반짝반짝 빛나는 별만 별이 아니야
이런 별도 있다고, 나도 예쁜 별이라고.
누가 뭐라고 부른대도
나는 나만의 빛을 머금고 있지
나는 나의 모습을 사랑해
지금 이대로. 사랑해
어째 느낌은, 작곡 직후, 그 느낌을 살려 허접한 우쿨렐레 실력으로 반주한게 더 난 것 같다.
건반으로 연주하려니 괜히 기교 들어가서 집중 안되는...
(근데, 이 땐 우쿨 실력이 정말 허접했었구나. 북북@ 벅벅@ 소리가 마구 난다. 지금도 딱히 더 발전하진 않았지만 뉴뉴ㅠㅠ)
작곡이랍시고 끄적였던. 곡.
영하 10도의 하루
아침에 일어나보니 오늘은 영하 10도의 하루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어
영하 10도에도 우리의 출근은 계속 된다
이런 날도 예외는 없다네
빽빽한 성냥갑 같은 지하철 안에
나도 하나의 성냥이 되어
목도리 안으로 땀이 차지만
벗을 수 없어, 빽빽한 지하철
부장님, 추위를 기다리셨나봐요
못 보던 모피코트, 얼마 짜리일까
추운 사람은 더 추워지는 영하 10도의 하루
몸도 얼어붙고, 마음도 얼어붙은,
영하 10도의 하루
가사를 붙이고 보면, 늘 30% 정도 맘에 안 든다.
가창력은 포기하고서라도 -_ㅠ
이러저러한 핑계로 맨날 공개 게시를 미루고 미루다가...
이러믄서 어느 세월에 칼을 뽑나 싶어서 이제 뽑아부렸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첫 방출 하였으니 이뿌게 봐주세요 >.<
우리 회사는 나름 “평등한 호칭”이라는 마인드로, ‘-씨’라고 부르지 않고 ‘-님’으로 부른다.
보통 회사에서 ‘-씨’라고 불려지는 사람들이라 함은,
‘-대리님’ ‘-과장님’ ‘-팀장님’ 같은 식의 마땅한 직급이 없는. 평사원, 혹은 아랫사원이다.
그래서 평사원에게도 나름 ‘-님’ 자를 붙여주고자 하는 게, ‘평등’을 지향하는 회사의 실천인 것 같다.
근데 이게, 우리끼리 있을 때는 상관 없는데, 가끔 외부인들이 매우 난감해할 때가 있다.
마치 온라인 커뮤니티 정모에서 “꽃향기님 오셨습니다. 바람에 휘날리다님 오셨습니다.” 하는 느낌을 받은 듯한 표정이다.
지난주에 접선한 외부 거래인들은, 우리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선생님이라는 호칭도 괜찮은 것 같다. 정중한 “Mr.-” 의 느낌을 풍긴달까?
우리에게 ‘을’ 입장인 모 거래처는 나에게 “-대리님”이라고 부른다. 이러면 일을 좀 더 잘해주게 된다. ㅋㅋ 대리인 척 하려고...
모 거래처는 나에게 “-씨”라고 편하게 부른다. (이러면 나도 걍 어리다는 포지셔닝으로 편히 가는 거다. 읭? 저 아직 이런거 멀라요 쩜쩜.)
그런데, 오늘 어떤 거래처 막내직원이 나에게 요청사항에 대한 장문의 이메일을 썼는데, 일단 제목, “사원님, ** 입니다.”
처음엔 시스템에서 일괄적으로 온 메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메일의 모든 문장에 “오’사원’님”, “오’사원’님께서”, “오’사원’님과” ,“오’사원’님의” 이라며 “사원”을 다 붙인 것이다.
심지어 전화가 와서는 “사원님! 저 XX 인데요~”
사원님이 뭐니.! ‘-씨’라고 부르기엔 너가 행여 나보다 어린 것 같아 민망하다면, 모르는 척 “대리님” 이라고 불러도 좋아. 아니면 차라리, ‘-씨’라고 불러줘. 회사 외의 사람들에게만 ‘-씨’라고 불리다 보니, 그게 더 정감 가기도 한다.ㅋㅋ
근데 사원님은! 사원님은! 사원님은!
=__________=
연예인 김제동이 얼마 전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스펙이란 말은 사용설명서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계입니까?”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실제 영어사전에 ‘스펙(spec)’은 사양, 혹은 설명서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국어사전에는 ‘직장을 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학력·학점·토익 점수 따위를 합한 것을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스펙’이라는 같은 단어를 두고 한쪽은 제품에 관한, 한쪽은 사람에 대한 용어로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온통 ‘자신의 사양’을 높이려는 이 스펙 열풍에 휩싸여 있다. 푸른 청춘들이 스스로를 제품으로 풍자하고, 그 제품을 돋보이도록 하기 위한 설명서를 교육에 빗대며 자조하는 슬픈 장면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스펙 열풍’을 경제학적 관점에 대입해 보면, 왜 이 시대의 청년들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지를 금세 알 수 있다. 경제학적으로 한 인간의 ‘가능성’을 그가 가진 ‘스펙’, 즉 졸업장·수료증·연수경력·증명서 등으로만 평가한다면, 그것은 곧 회계상의 ‘고정자산’ 개념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백과사전에 “고정자산은 건물·토지 등 기업이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영업활동에 사용하고자 취득한 자산으로, 판매 또는 처분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것들을 가리킨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즉 기업이 생산과 영업활동에 이용하기 위해 필요한 밑천이 ‘고정자산’인 셈인데, 여기에는 건물·기계 장치·특허권·어업권·광업권·상표권 등 무형의 설비들이 모두 포함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청년들의 ‘스펙’이 곧 기업의 ‘고정자산’이라는 회계상의 용어와 얼마나 정확히 일치하는지, 또 우리가 얼마나 섬뜩한 물신숭배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를 금세 체감할 수 있다. 기분 나쁘지만 이것을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더 큰 문제가 남는다. 먼저 기업은 영업활동을 통해 밑천인 고정자산에 투입한 비용(본전)을 가능한 한 빨리 회수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감가상각’의 개념이다. 영업활동을 통해 번 돈 중의 일부를 본전을 회수하는 비용으로 미리 떼놓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업도 본전부터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이익은 그 다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청년들의 경우는 어떨까? 최근 사교육 열풍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일생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을 갖추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이 투입된다.
한 청년이 스펙이라는 이름으로 된 고정자산을 취득하기 위해 투입한 모든 비용을 누적복리로 계산한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자본금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 설령 운이 좋아 쉽게 취직했다 하더라도 이후부터 그는 자신의 투입비용에 대한 감가상각을 시작해야 한다.
문제는 감가상각의 기간이다. 과거 기성세대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최근 청년들은 감가상각을 통해 회수하기에는 너무 많은 비용을 투입하고 있다. 그 와중에 얻은 기회(직장)마저 불안정하거나 급여가 충분하지 않다면, 지금 우리 시대의 청년들은 평생에 걸쳐 자신의 비용을 감가상각조차 하지 못한 채 일생을 마무리하게 될 공산이 크다. 절망적 구조인 셈이다. 기업이 영업활동을 통해 본전마저 회수할 수 없다면, 그 기업의 구성원들은 탈출을 모색하겠지만, 그것이 자신의 문제라면 탈출구가 없다. 또 청년이 시시포스의 바위를 밀어 올리며, 미래를 꿈꿀 수 없다면 그 사회의 미래도 없다.
이 문제의 일차적인 해법은 ‘사람’을 ‘사양’으로 평가하는 구조를 과감히 혁파하는 방법밖에 없고, 그 출발은 인재를 선발하는 기준부터 획기적으로 바꾸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만 스펙을 만들기 위해 투입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민간에 강제할 수 없다면 공공부문과 정부부문에서 저소득층 자녀 우선 선발과 지역균형 선발 확대, 그리고 대학별 쿼터제한 같은 파격적인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을 취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망설이면 늦다. 청년들의 숨통을 틔우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부터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박경철 ‘시골의사’
금요일 저녁, 부산에서의 1박2일을 위한 가방을 싸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최루액 맞을지도 모르니 우비를 챙길까?’, ‘아냐, 무슨 최루액 맞을 생각까지. 그럴 땐 피할 생각을 해야지.’, ‘잘 때 입을 여벌옷 챙길까?’, ‘잘 새가 있겠어?’...... 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하지만, 이렇게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내가 부산에 가야 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이건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진중공업에서 일어난 구조조정과 경영진의 위법행위가 여기서 우야무야 무마된다면 언젠가는 내 일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3차 희망의 버스에 탑승했다.
부산 영도구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곳곳에 시커먼 전의경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청학성당에 내려서 미사를 보기 위해 고작 200m 앞으로 걸어가는 길에도 수많은 장벽이 있었다. 우리를 가로막은 전의경은, 우리가 이 지역 주민이 아니라며 통행을 금지시켰다. 국민에게 도로에서 통행을 금지할 근거가 무어냐, 신분증을 요구하는 근거가 무어냐, 아무리 따져도 이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들에게 "정당한 근거"나 "법에 따른" 것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이 크레인 앞으로 가는 것을 무조건 막는 것이 그들의 임무일 뿐이었다. 무슨 성당에 다니냐는 둥, 신자임을 어떻게 증명 하냐는 둥 전의경 지휘관이라는 사람은 쓸데없는 질문만 늘어놓으며 어떻게든 우리의 통행을 막을 꼬투리를 잡으려 했지만 상황은 점점 이상해질 뿐이었다. 이렇게 이상한 상황이 한참 지속된 후에야, 딱히 더 막을 근거가 궁색한 그들은 길을 터주었고, 우리는 신도브래뉴 아파트 단지 안의 미사장소에 갈 수 있었다.
미사 진행 중에 어떤 할아버지가 뛰쳐들어와 미사를 왜 여기서 하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왜 미사를 성당에서 하지 않고 여기서 이렇게 방해 하냐는 거다. 그 와중에도 꿋꿋이 미사를 진행하는 사제들을 보며, 나는 울컥하는 마음이 일었다. 내가 아는 예수는 시원한 성당 안에서 깔끔 떨며 미사하지 않았다. 거리에서, 환자들과, 식사도 제대로 못하며 함께 했다. 그런데 어떻게, 미사를 성당 ‘안’에서나 하라는 말이 나온 걸까? 종교에서 왜 정치에 개입 하냐고 하지만, 종교에서 왜 정치에 개입하지 않아야 하는가? 정치도 일상과 분리되고, 종교도 일상과 분리되는가? 정치와 종교와 일상은 다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는 것인데, 종교를 정치와 분리시켜 생각하는 이들이야 말로, 종교를 한낮 사교와 취미활동, 나의 심신을 안정하는 곳으로 격하시켜서 생각하는 것 같아 화가 난다. 내가 치료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보다 성숙하려면, 예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보듬어 안기 위한 책임도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신도브래뉴 거주자의 70% 이상이 한진 노동자와 그 가족이라는데, 아직 본인에게 닥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사태를 ‘정치’라느니 ‘빨갱이’라느니 라는 말로 매도하는 주민들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더불어, 이럴 때 일수록 미사는 거리에서, 어려운 이웃에 관심 없는 사람들을 방해하면서라도 꿋꿋이 열렸으면 한다.
우리 회사는 노숙인 급식, 판자촌 연탄배달, 고아원 봉사활동을 한다.
굳이 주말에, 아무런 보상도 없는데 자발적으로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회사 직원들은 분명 “착한” 사람들 일 것이다. 노숙인에게 웃음으로 대하고, 팔이 부러져라 연탄을 나르고...
그러나, 이 단순하기 짝이 없는 '봉사활동'이 나에겐 너무 복잡하게 느껴진다.
이 판자촌 사람들이, 우리 회사 사람들의 뉴타운 입주로 인해 집을 잃은 원주민이라면? 우리네 회사원과의 경쟁에서 밀려, 해고당한 사람이라면? 그들이 그토록 시끄럽다고 눈쌀 찌뿌리는, 빨간 띠 두른 시위대들의 구호가 실은 이거라면?
그래서 나는, 봉사활동 참가하는 직원들을 보며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저 명품가방, 명품자가용, 큰 집을 소유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위안을 위하여 “봉사활동”이라는 아주 훌륭한 아이템을 또한 소비하고 있다' 라고 말이다. 물론 본인들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겠지만, 몰랐다고 해서 죄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이 사회에 정확히 한표의 책임이 있는 유권자인 성인들인데, 무지해도 괜찮다는 말, 정치는 잘 몰라~ 라는 말은 졸업해야 할 때가 지나도 벌써 지났어야 한다.
가톨릭학생회에서는 ‘농활’을 ‘농촌공소활동’의 약자라고 한다. 잘 모르는 후배들이 행여나 '농촌봉사활동'이라고 할 때에는 반드시 수정해주어야 한다. 공소활동이란, 농촌에서 신앙공동체 생활을 하며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 동아리 회원들은 가기 전에 사전 교육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느껴야 하는지 고민한다.
회사 봉사활동이 문제인 가장 큰 이유는 봉사활동의 의미 혹은 그들에 대한 이해의 부재이다. 회사사람들을 대상으로 판자촌 사람들이 왜 여기 모였는지, 지금 또 쫓겨날 위기에 있는지, 어떤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설지, 재개발이 만드는 양극화. 이런 얘기를 할 수는 없다. 차선이지만, 그나마 "착한" 이들에게 감정으로 호소하여 '돈'을 많이 기부하는 것 뿐.
다음 봉사활동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다시금 여러 고민이 시작된다. 늘 돌고 도는 고민이다, 자칫하면 이 봉사활동이, "가난한 이들의 존재"를 '봉사활동'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못박게 되진 않을까, 그들(봉사활동 받는이들)과 우리들(봉사활동 해주는 이들)을 가르게 되진 않을까, 그러면서 시선을 아래로 내려다보진 않을까, 봉사활동 참가자들의 "착한 행동"과 대치되는 일상은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여러 고민을 하다보면, 결론은 회사 내부에서는 불가능 하고, 대신 좀 더 유연한 사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독서모임, 영화모임, 종교단체 모임, 기타 등등...
더 나아가, 봉사활동이 필요 없는 사회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어렵다, 아 어려워

